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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비 브로콜리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아주 가끔 숀 코네리가 얇은 입술의 냉혹한 본드를 제대로 보여줄 때도 있긴 하지만, 제1편부터 도대체 심각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고, 코네리의 짤막한 농담은 기껏해야 로저 무어의 눈썹을 찌푸리게 할 뿐이다. 도대체 센스라는 게 있는 제작자라면 『카지로 로얄』— 플레밍의 본드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으로, 1967년작 영화는 기껏해야 소설에 대한 엉터리 패러디 수준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은 시대물로 찍었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지금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냉전사상의 흑백논리부터 프랑스 북부의 다 낡은 카지노 타운에서 아보카도 비니그레트를 애피타이저로 주문하는 본드의 믿겨지지 않는 이국적 입맛까지,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것은 작품이 쓰여진 1950년대 초반의 냄새를 짙게 풍기고 있는 것이다. 플롯은 단순하다 못해 아주 기본적이다. 악당인 르 쉬프르는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러시아 스파이로, 유용한 KGB 공금을 채워 넣기 위해 도박장을 찾았다. 비밀 정보국에서도 가장 뛰어난 노름꾼인 본드는 도박 테이블에서 르 쉬프르를 때려눕히고 프랑스 내에 있는 그의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 파견된다.

당연히 본드의 생명이 위협을 당하게 되고, 스물다섯 페이지에 걸친 바카라 게임이 등장하며, 자동차 추적과 멋지게 묘사된 그로테스크한 고문 장면에 구출까지. 결말은 본드의 회복과 “본드 걸” 베스퍼 린드의 이야기로 이상하게 압축되며, 불필요한 배신과 여성혐오의 폭발로 막을 내린다. 플레밍은 딱딱하고 가감없는 문장에 거의 도착에 가까운 디테일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다보면 본드의 트레이드 마크인 마티니를 어떻게 만드는지 아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유일하게 책장이 마구 넘어가는 도박과 채찍질 장면— 플레밍이 가장 좋아했던—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주인공의 얼굴처럼 “말 없고, 잔인하고, 아이러니하고, 냉혹했을” 것이다. 놀음닷컴

2019년 4월 22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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